명상록 썸네일형 리스트형 공적영지(空寂靈知 마나사로바 호수 공적영지(空寂靈知)는 진공묘유(眞空妙有)와 더불어 불교진리의 본질적 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깨달음을 잘 드러내는 멋진 표현이다. 텅 비우고 알아차릴 때 지혜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여기서 텅 비움은 공적(空寂)이요 알아차림은 영지(靈知)라고 할 수 있다. 신령스런 알아차림 그것을 곧 영지라고 표현하고, 텅 비우고 알아차리는 것은 곧 지혜요 전지전능(全知全能)이다. 이와 같이 ‘공적(空寂)’은 텅 비어서 고요한 상태를 묘사한 말인데, 적적(寂寂)ㆍ적정(寂靜)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영지(靈知)’는 문자 그대로 신령스러운 지혜광명을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공적영지(空寂靈知)란 텅 비고 고요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밝고 신령스럽게 나타나는 지혜의 작용을 말한다. 이는 진리의 .. 더보기 삶과 죽음의 균형/수정 삶과 죽음의 균형 우리는 八不中道가 존재하므로 어디서 왔거나 어디로 가지 않는다. *팔부중도 : 八(여덟 팔):(왼편 네 손가락 상형)+(오른편 네 손가락 상형)의 지사자(指事字)이다. 不(아니 불):一(하나 일)+(새가 날아오르는 상형)의 상형자(象形字)이다. 中(가운데 중):넓은 공간에 깃발을 세워놓은 모양의 상형자(象形字)이다. 道(길 도):首(머리 수)+(걸어갈 착)의 회의자(會意字)이다. 팔부중도는 중관사상(中觀思想)을 정립시킨 제2의 붓다로 불리는 龍樹보살(나가르쥬나150~250년경)의 중론·귀경게(中論·歸敬偈)에 나타난 사상으로 생(生)과 멸(滅), 상(常)과 단(斷), 일(一)과 이(異), 거(去)와 래(來) 등의 여덟 가지 극단에 치우친 迷妄을 타파하여 깨달음의 중도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 더보기 전광석화電光石火 電光石火. 발뒤꿈치 한 번 돌리면 열리는 세상이기에, 불교는 하나도 어렵지 않다. 조고각하. 어려운 것은 이 밝은 지식의 불꽃을 유지하는 데 있다. 눈 크게 뜨고 스승의 눈을 바라보면서 귀를 세우면 붓다의 가르침은 어렵지 않다. 이 밝은 지혜의 불꽃을 유지하기가 어렵지. 강조하건대 돈오는 쉬운데 점오와 점수가 어렵다. 쉽게 내준 물건은 쉽게 걷어가는 까닭이다. 누가 깨달음을 한 번으로 끝난다고 했는가. 누생累生에 걸친 업장을 털기가 그리 쉽다면 깨달음이겠는가. 보살도 털지 못하는 업장인 다음에야! 닦고 닦아 입전수수入廛垂手의 길에 들어서면 붓다의 염원이었던 모든 중생의 구원이 멀겠는가. 四無量心, 붓다의 사무침이여. 다시 말해, 頓悟는 쉬운데 漸修는 어렵다. 요컨대 불교는 이렇다 할 물건을 쉽게 내주지 .. 더보기 회광반조 조고각하(廻光返照 照顧脚下) 내 시의 샘물은 붓다의 가르침이다. 붓다의 샘은 마르지 않는 깊은 샘을 닮아 시집 4집을 내면서 잠시 물갈이를 위해 마음껏 퍼냈다. 남는 것은 사성제와 팔정도만 남았다. 인연생기법因緣生起法, 곧 연기법은 영원히 마르지 않아 끝까지 남아 우리 모두의 몫임을 물을 통해 밝혔다. 만약 북방불교를 공부했다면 십바라밀을 더해라. 더 깊이 퍼내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해오면서 느낀 의문에 대한 합리적 예의가 아니다. 뜬금없이 합리성을 내세우는 이유는 나의 두뇌는 비논리적 ∙ 비합리적 신화와 전설, 설화를 경계警戒하는 형이하학적 境界에 속하고, 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이다. 더 이상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과 비판 속에서 살기에는 내 여명餘命은 짧다. 불교는 종교가 아닌 철학이라는 신념에 변함이 있을 수 .. 더보기 이전 1 ··· 4 5 6 7 다음